신민당 (196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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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민당 (1967년)은 1967년 2월 민중당과 신한당을 중심으로 창당된 대한민국의 야당이다. 윤보선, 유진오 등을 중심으로 제6대 대통령 선거에 참여했으나 박정희 후보에게 패배했다. 삼선개헌 반대 운동, YH 사건, 김영삼 총재의 의원직 제명 파동 등 주요 사건들을 겪었으며, 1970년대에는 김대중, 김영삼 등이 당을 이끌었다. 1978년 총선에서 여당을 앞서는 성과를 거두었으나, 1980년 신군부에 의해 해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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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 제8대 국회의 원내정당 - 국민당 (1971년 대한민국)
1971년 윤보선을 총재로 창당된 국민당은 양당제 재편을 시도하며 대미 일변도 외교 지양과 경제 불균형 시정을 주요 정책으로 내세웠으나, 선거 참패와 유신 이후 정치 활동 금지로 1973년 해산되었다.
신민당 (1967년) - [정당]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국문 명칭 | 신민당 |
한자 명칭 | 新民黨 |
로마자 표기 | Sinmindang |
약칭 | NDP (영문) |
창당일 | 1967년 2월 7일 |
해산일 | 1980년 10월 27일 |
중앙 당사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
상징색 | 붉은색 (#DC352A) |
초대 대표 | 유진오 |
이념 및 정치 성향 | |
이념 | 자유주의 보수주의 민주화 빅텐트 |
정치 스펙트럼 | 중도 ~ 중도우파 |
역사 | |
창당 목표 | 분열된 보수 야당 세력 통합 및 평화적 정권 교체 |
첫 번째 창당 | 1967년 2월 7일 |
두 번째 창당 | 1969년 9월 22일 |
첫 번째 해산 | 1969년 9월 8일 |
최종 해산 | 1980년 10월 27일 |
후계 정당 | 신한민주당 |
기타 | |
관련 정당 | 자유당 |
색상 | }} 붉은색 |
본부 | 서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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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
1967년 2월 7일, 민중당과 신한당을 중심으로 분열된 민주세력을 모아 신민당이 창당되었다.[9] 1969년 9월 8일 박정희의 3선 출마를 허용하는 삼선개헌에 대한 의견 불일치로 당내 위기가 발생하여 자진 해산하였다가, 9월 22일 재등록하였다.
1970년 1월 26일 자유당을, 2월 3일에는 한국독립당을 흡수 합당하였다.[9] 1971년 김대중 후보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박정희 후보에게 패배하였다.
유신 체제 시대인 1974년 8월 22일 당 대회에서 김영삼을 총재로 선출하였다. 김영삼은 민주 회복과 헌법 개정을 주장하며 정부·여당에 대항했다.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여당 민주공화당을 근소한 차이로 앞지르며(신민당 32.8%, 민주공화당 31.7%) 정권에 대한 비판 여론의 힘을 보여주었다. 1979년 다시 김영삼을 총재로 선출하면서 신민당은 반군정(反軍政) 자세를 분명히 했다.
그러나 전두환이 5·17 쿠데타로 정치 실권을 장악하자 정치 활동을 중단당했고,[5] 1980년 10월 27일에 공포된 제5공화국 헌법 부칙에 따라 해산되었다.[9]
2. 1. 창당 배경 및 초기 활동 (1967-1970)
1967년 2월 7일, 민주공화당의 박정희 정권에 대항하기 위해 민중당과 신한당을 중심으로 하는 야권 통합으로 신민당이 창당되었다.[9] 창당 직후 치러진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 윤보선 전 대통령을 후보로 내세웠으나, 박정희 후보에게 패배하였다.1969년, 박정희의 3선 출마를 가능하게 하는 삼선개헌에 반대하여 당을 일시 해산하고 재창당하는 등 강력하게 저항하였다. 당시 헌법개정안 가결정족수는 117명 이었는데,[12] 신민당 성낙현,[10] 조흥만,[10]연주흠[11] 의원이 개헌 지지 성명을 발표하여 개헌안 찬성 서명의원이 122명이 되었다. 이에 신민당 유진오 총재는 9월 7일 긴급 전당대회를 열어 헌법개정지지성명을 낸 3명을 제외한 나머지 의원 44명을 제명하고 당을 해산하여 헌법개정지지성명을 냈던 의원의 의원직이 상실[13][14] 됐다.
무소속이 된 44명의 의원은 원내교섭단체인 신민회를 구성하고, 삼선개헌 즉시 철회, 삼선개헌 분쇄를 위한 총력 경주, 민권 강압행위 중지, 공무원의 범법행위 거부 및 국민의 편에서 총궐기 촉구, 최단 시일 내 당 재건 등의 결의문을 발표하였다.
1969년 9월 20일 신민당 창당준비위원회는 창당대회를 열고 유진오 전 신민당 총재를 총재로 추대하고 유진산, 이재형, 조한백 전 신민당 부총재들을 부총재로 추대한 뒤 구 신민당의 당헌과 정강정책을 그대로 채택함으로써 신민당을 복원했다.
년 | 월일 | 주요 사건 |
---|---|---|
1967년 | 2월 7일 | 민중당과 신한당이 통합하여 신민당 창당. 대표 최고위원(당수)에 유진오, 대통령 후보에 윤보선 선출. |
5월 3일 | 대통령 선거에서 윤보선이 민주공화당의 박정희에게 패배. | |
6월 8일 | 제7대 총선에서 44석(지역구 27석/전국구 17석) 획득 | |
1968년 | 5월 20일 | 제2차 전당대회에서 집단 지도 체제에서 총재(당수) 중심의 단일 지도 체제로 변경.[6] 21일에 유진오를 총재로 추대.[7] |
1969년 | 9월 7일 | 삼선개헌에 찬성한 당 소속 의원들의 의원직 박탈을 위해 당 해산. |
9월 20일 | 창당 대회를 개최하고 신민당 재결성. |
2. 2. 김대중의 등장과 7대 대선 (1970-1971)
1970년 1월 26일 자유당을 흡수 합당하고, 2월 3일에는 한국독립당을 흡수 합당하였다.[9] 같은 해 9월 29일 당 대회에서 김대중을 대통령 후보로 선출하였다.[9]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 후보는 45.3%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박정희 후보와 접전을 벌였다.1971년 5월 6일, 제8대 총선 후보자 등록 마감일에 이른바 "진산 파동"이 발생하면서 당내 갈등이 심화되었다.[9]
년 | 월일 | 주요 사건 |
---|---|---|
1970년 | 1월 26일 | 신민당 당수에 정부에 대한 온건파인 유진산(柳珍山)이 선출됨. |
9월 29일 | 당 대회에서 김대중(金大中)을 대통령 후보로 선출함. | |
1971년 | 4월 27일 |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이 여당인 민주공화당의 박정희 대통령에게 패배함. |
5월 6일 | 제8대 총선 후보자 등록 마감일, "진산 파동" 발생. | |
5월 25일 | 제8대 총선에서 개헌 저지선인 69석을 크게 웃도는 89석(지역구 65석/전국구 24석)을 획득함. |
2. 3. 유신 체제와 김영삼 총재 (1972-1979)
1972년 10월 유신 이후, 신민당은 당내 분열을 겪었으나 1973년 유진산 총재 체제로 재편되었다. 1974년 4월 28일 유진산 총재가 서거하자, 같은 해 8월 22일 열린 임시 전당대회에서 김영삼이 총재로 선출되었다. 김영삼은 민주 회복과 헌법 개정을 주장하며 정부와 여당에 강경하게 맞섰다.1974년 8월 22일 신민당 임시 전당대회 총재 경선 결과는 다음과 같다.
1976년 5월 25일 열린 신민당 전당대회는 이른바 "신민당 각목사건"으로 불리는 폭력 사태로 얼룩졌다.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대통령 경호실장은 온건 노선을 내세운 이철승 국회의원을 당수로 만들기 위해 정치공작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김태촌이 이끄는 조직폭력배들이 동원되어 당사를 공격하고, 김영삼계 의원들은 폭력을 피해 대피해야 했다. 결국 비주류만의 전당대회에서 이철승 의원이 대표로 선출되었고, 당은 분열되었다. 이후 주류와 비주류는 이충환 의원을 총재대행으로 추대하고 전당대회를 다시 치르기로 합의했다. 다시 치러진 전당대회에서는 최고위원제를 도입하고 이철승을 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했다.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은 32.8%의 득표율을 기록하여 민주공화당 (31.7%)을 근소한 차이로 앞서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는 박정희 정권에 대한 비판 여론이 높아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결과였다. 1979년 5월 30일 신민당 전당대회는 다시 김영삼을 총재로 선출하면서 반군정(反軍政) 자세를 분명히 했다.
2. 4. 김영삼 총재 복귀와 신군부 (1979-1980)
1979년, 신민당은 다시 김영삼을 총재로 선출하면서 반군정(反軍政) 자세를 분명히 했다.[5] 김영삼은 야당과 여당의 타협을 시도하지 않고 민주 회복과 헌법 개정을 주장하며 정부·여당에 대항했다.같은 해 4월 11일에는 신민당 본부에서 노사 분쟁 해결을 호소하며 농성 중이던 YH무역 여성 노동자들을 경찰이 강제 진압하는 과정에서 여성 노동자 1명이 사망하는 YH 사건이 발생했다. 9월 10일에는 김영삼 총재가 뉴욕 타임스 기자와의 회견에서 "미국의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원 중단"을 요청하였다. 10월 4일에는 여당인 민주공화당과 신정회 의원들이 김영삼 신민당 총재의 의원직 제명안을 단독으로 강행 처리하는 김영삼 총재 의원직 제명 파동이 일어났다. 신민당은 항의의 표시로 소속 의원 전원의 국회 출석을 거부하였고, 10월 13일에는 김영삼 총재 의원 제명에 대한 항의로 신민당 국회의원 66명이 사퇴서를 제출하였다.
10월 26일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측근인 김재규에게 암살당하는 박정희 암살 사건이 발생했다. 11월 9일에는 당 정무회의에서 국회 복귀를 결정했다.
그러나 전두환이 5·17 쿠데타로 정치 실권을 장악하자 신민당은 정치 활동을 중단당했고,[5] 1980년 10월 27일에 공포된 제5공화국 헌법 부칙에 따라 해산되었다.[9] 이듬해 1981년에 결당된 민주한국당에는 김영삼, 김대중을 제외하고 정치 활동 규제 조치에서 제외된 당내 온건파만이 참여했다.
년 | 월일 | 주요 사건 |
---|---|---|
1979년 | 5월 30일 | 집단 지도 체제에서 총재 중심의 단일 지도 체제로 당규를 개정하고, 당 대회에서 김영삼이 이철승을 누르고 총재로 선출됨. |
4월 11일 | 신민당 본부에서 노사 분쟁 해결을 호소하며 농성 중이던 YH무역 여성 노동자들을 경찰이 강제 진압하는 과정에서 여성 노동자 1명이 사망함(YH사건). | |
9월 10일 | 김영삼 총재가 뉴욕 타임스 기자와의 회견에서 "미국의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원 중단"을 요청함. | |
10월 4일 | 여당인 민주공화당과 신정회 의원들이 김영삼 신민당 총재의 의원직 제명안을 단독으로 강행 처리함(김영삼 총재 의원직 제명 파동). 신민당은 항의의 표시로 소속 의원 전원의 국회 출석을 거부함. | |
10월 13일 ~ 10월 26일 | 10월 13일 김영삼 총재 의원 제명에 대한 항의로 신민당 국회의원 66명이 사퇴서를 제출함. 통일당 의원 3명도 사퇴서를 제출함. 이후 10월 26일 박정희 암살 사건 발생. | |
1980년 | 5월 17일 |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의 5·17 비상계엄 확대 조치(5·17 쿠데타)로 정치 활동이 금지됨. |
10월 27일 | 제5공화국 헌법 공포·발효로 당이 해산됨. 이듬해인 1981년 1월 17일에 기존 신민당 정치인들을 중심으로 민주한국당이 결성됨. | |
신민당은 창당 초기 유진오 대표위원 체제로 운영되었으나, 1968년 유진오가 총재로 선출되면서 총재 중심 체제로 전환되었다. 유진오 총재는 1970년 뇌졸중으로 사퇴하기 전까지 당을 이끌었다. 이후 유진산, 김홍일, 김영삼, 이철승 등이 당 대표를 역임하며 당의 변화를 이끌었다.[1]
3. 주요 지도부
신민당 창당 당시 주요 지도부는 다음과 같다.[1]직책 이름 총재 유진오 고문 백낙준, 이범석, 박순천 전당대회 의장 김의택 전당대회 부의장 정운갑 총무위원장 고흥문 조직위원장 김재광 선전위원장 김대중 재정위원장 김세영 정책위원장 부석혁 감찰위원장 신태악
3. 1. 역대 총재 및 대표
대수 | 역대 대표 | 직함 | 임기 | 비고 |
---|---|---|---|---|
1 | 유진오 | 대표위원 | 1967년 2월 7일 ~ 1968년 5월 20일 | |
2 | 총재 | 1968년 5월 20일 ~ 1969년 5월 21일 | ||
3 | 총재 | 1969년 5월 21일 ~ 1970년 1월 26일 | 뇌졸중으로 사퇴[1] | |
4 | 유진산 | 대표위원 | 1970년 1월 26일 ~ 1971년 5월 8일 | 진산 파동으로 사퇴[1] |
임시 | 김홍일 | 대표대행 | 1971년 5월 8일 ~ 1971년 7월 21일 | 유진산 사퇴로 권한대행[1] |
5 | 대표위원 | 1971년 7월 21일 ~ 1972년 9월 26일 | [1] | |
6 | 유진산 | 총재 | 1972년 9월 26일 ~ 1974년 4월 28일 | 단독 전당대회로 선출, 유신 후 통합 위해 사퇴, 서거[1] |
임시 | 김의택 | 총재권한대행 | 1974년 4월 28일 ~ 1974년 8월 22일 | 유진산 서거로 대행[1] |
7 | 김영삼 | 총재 | 1974년 8월 22일 ~ 1976년 5월 25일 | [1] |
임시 | 이충환 | 총재권한대행 | 1976년 6월 12일 ~ 1976년 9월 15일 | 통합전당대회를 위한 임시직[1] |
8 | 이철승 | 대표최고위원 | 1976년 9월 15일 ~ 1979년 5월 30일 | [1] |
9 | 김영삼 | 총재 | 1979년 5월 30일 ~ 1980년 8월 13일 | 총재단 직무정지, 신군부 협박으로 정계은퇴[1] |
임시 | 이민우 | 총재권한대행 | 1980년 8월 13일 ~ 1980년 10월 27일 | 5공화국 헌법부칙에 따라 해산[1] |
3. 2. 기타 주요 인물
윤보선은 대통령 후보로, 김대중은 대통령 후보 및 야당 지도자로 활동했다. 정일형과 이민우는 총재 권한대행을 역임했다.[1]4. 주요 사건
1969년 9월 8일, 신민당은 박정희 대통령의 3선을 가능하게 하는 삼선개헌에 반대하여 당을 자진 해산했다.[9] 이는 헌법 개정 지지 성명을 낸 성낙현,[10] 조흥만,[10]연주흠[11] 의원 3명을 제외한 나머지 의원 44명을 제명하고 당을 해산함으로써, 헌법 개정 지지 의원들의 의원직을 상실[13][14]시키기 위한 조치였다. 이후 무소속이 된 44명의 의원은 원내교섭단체인 신민회를 구성하고, 삼선개헌 반대 투쟁을 계속할 것을 결의했다.
1971년 5월 6일, 제8대 총선 후보 등록 마감일에 당내 계파 갈등인 "진산 파동"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1972년 9월 26일에는 유진산이 이끄는 주류파(진산계)와 김홍일계, 김대중계, 양일동계 등 비주류파(반진산연합계)가 각각 전당대회를 열어 당이 분열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1976년 5월 25일에는 신민당 각목사건이 발생했다.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대통령 경호실장은 온건 노선을 내세운 이철승 국회의원이 당수로 선출되기를 바라며 정치공작을 수행했다. 김태촌이 이끄는 조직폭력배들이 전당대회에 난입하여 김영삼계 의원들을 공격했고, 이로 인해 김영삼 총재는 다리가 부러져 병원에 실려가기도 했다. 결국 비주류만의 전당대회로 이철승 의원이 대표로 선출되었고, 주류 측은 이충환 의원을 총재대행으로 추대하고 전당대회를 다시 치르기로 합의했다.
1979년 8월 11일에는 YH 사건이 발생했다. 신민당사에서 농성 중이던 YH무역 여성 노동자들이 강제 진압당하고, 이 과정에서 1명이 사망했다.[5]
같은 해 9월 10일, 김영삼 총재는 뉴욕 타임스와의 회견에서 "미국의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원 중단"을 요청했다. 이를 문제 삼아 10월 4일 여당은 김영삼 총재 의원직 제명 파동을 일으켜 김영삼 총재의 의원직 제명을 강행했다. 이에 신민당은 항의의 표시로 소속 의원 전원의 국회 출석을 거부했다.
5. 역대 선거 결과
선거 | 날짜 | 후보자 | 득표율 | 당락 |
---|---|---|---|---|
대통령 선거 | 1967년 5월 3일 | 윤보선 | 40.9% | 낙선(2위) |
1971년 4월 27일 | 김대중 | 45.3% | 낙선(2위) | |
국회의원 선거 | 1967년 6월 8일 | 45석 (지역구 28석, 전국구 17석) | 32.7% | |
1971년 5월 25일 | 89석 (지역구 65석, 전국구 24석) | 44.4% | ||
1973년 2월 27일 | 52석 | 32.5% | ||
1978년 12월 12일 | 61석 | 32.8% |
5. 1. 대통령 선거
5. 2. 국회의원 선거
선거 | 대표 | 득표수 | 득표율 (%) | 의석 수 | 증감 | 순위 | 지위 | ||
---|---|---|---|---|---|---|---|---|---|
지역구 | 전국구 | 총합 | |||||||
1967년 | 유진오 | 3,554,224 | 32.74 | 28 | 17 | 45 | 신규 | 2위 | 야당 |
1971년 | 김홍일 | 4,969,050 | 44.38 | 65 | 24 | 89 | 44 | 야당 | |
1973년 | 유진산 | 3,577,300 | 32.55 | 52 | 37 | 야당 | |||
1978년 | 이철승 | 4,861,204 | 32.82 | 61 | 9 | 야당 |
6. 평가 및 유산
박정희 정권 시기인 1967년에 창당된 신민당은 민주주의를 옹호하고 국민의 기본권을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투쟁한 정당으로 평가받는다. 3선 개헌 반대[3],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 후보 지지 등 박정희 정권에 맞서는 자세를 보이며 선전했다.
유신 체제 하에서는 김영삼 총재를 중심으로 민주 회복과 헌법 개정을 주장하며 정부와 여당에 대항했다. 1979년에는 다시 김영삼을 총재로 선출하면서 반군정(反軍政) 자세를 분명히 했다.
신민당의 민주화 투쟁은 이후 한국 사회의 민주화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1987년 6월 항쟁의 밑거름이 되었다. 신민당 출신 인사들은 이후에도 한국 정치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며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특히, 신민당에서 주요 정치인으로 활동했던 김영삼과 김대중은 훗날 대한민국 대통령에 당선되어 민주주의 발전에 큰 업적을 세웠다.
그러나 1980년 전두환이 5·17 쿠데타로 정치 실권을 장악하자 정치 활동을 중단당했고,[5] 같은 해 10월 27일 제5공화국 헌법 부칙에 따라 해산되었다.[9]
참조
[1]
웹사이트
신민당
https://terms.naver.[...]
Doosan Encyclopedia
2021-09-19
[2]
웹사이트
신민당
https://terms.naver.[...]
2019-05-20
[3]
일반
[4]
일반
[5]
Youtube
1980.5.19 뉴스 광주사건 衆議院ハプニング解散
https://www.youtube.[...]
[6]
간행물
신민당2차전당대회 단일지도체제를 채택
http://gonews.kinds.[...]
동아일보
1968-05-20
[7]
간행물
총재단 혼선끝에 선출
http://gonews.kinds.[...]
동아일보
1968-05-21
[8]
일반
[9]
일반
[10]
뉴스
성락현·조홍만 신민당의원 개헌지지성명
http://dna.naver.com[...]
동아일보
1969-07-30
[11]
뉴스
신민당 연주흠의원 개헌지지성명
http://dna.naver.com[...]
동아일보
1969-07-30
[12]
법률
헌법 제6호 제120조 ②
http://ko.wikisource[...]
[13]
법률
헌법 제6호 제38조
http://ko.wikisource[...]
[14]
뉴스
신민당 해산
http://dna.naver.com[...]
동아일보
1969-09-08
[15]
서적
(제목 없음)
http://www.한국현대사.com
민연
2000-02-01
[16]
서적
한국정치변동론
법문사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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